01. Recent Life : 한국이라는 낯선 익숙함에 적응하는 법
Q. 요즘 어떤 삶을 살고 계신가요?
미국 미시간에서 8년을 살다 작년 7월 한국으로 돌아왔습니다. 돌아온 지 1년이 채 되지 않은 지금, 몸에 배어버린 타국의 생활 방식과 한국의 현실 사이를 다시 맞추어 가는 중입니다. 개인 작업을 지속하며 여러 지원 프로그램에 도전하고, 대안학교 아이들에게 미술을 가르치며 새로운 일상의 뿌리를 내리고 있습니다.
02. Definition of 'Home' : 삶의 여정처럼 끊임없이 움직이는 동사
Q. 민영님에게 ‘집’은 어떤 의미인가요?
제가 '집'이라는 주제로 작업을 시작한 건 한국에 오기 전이었어요. 보통 사람들은 집을 고정된 장소나 안정된 공간으로 생각하지만, 저에게 집의 의미는 조금 달랐어요. 저에게 집은 고정된 형태라기보다 하루하루를 살아내는 과정에 가깝습니다. 기억도, 형태도, 실제 삶도 계속 달라지기 때문에 집은 하나의 장소라기보다 끊임없이 이어지는 여정처럼 느껴졌거든요.
어쩌면 이런 관점은 삶을 완성된 상태가 아니라 계속 성장하고 이동하는 여정으로 바라보는 BYS의 태도와도 참 닮아 있는 것 같아요.자의 존재가치를 발견하고, 각자가 가진 고유한 인생을 꽃피워 갈 수 있도록 돕고 싶은 마음'을 담아서 ‘라이프 플로리스트’ 라는 이름을 지어서 사용하고 있습니다.
03. Isa 시리즈의 탄생 : 킬로바이트(KB)의 문장이 킬로그램(kg)의 존재가 되기까지
Q. Isa 시리즈는 어떻게 시작되었나요?
미국에서의 시간은 제게 침묵의 시간이기도 했어요. 언어의 장벽 때문에 머릿속엔 많은 생각들이 있어도 대화 속에서 표현할 수 있는 말이 거의 없었거든요. 갈 곳 잃은 말들을 품고 집으로 돌아오면, 저는 그날의 일과 생각들을 글로 써내려 갔습니다.
특히 막내 아이가 태어나고 첫 1년은 그림에 대한 갈증이 가장 깊었던 시기였어요. 무언가 그릴 상황은 안 됐기에 대신 “나라면 이렇게 그렸을 텐데.”라는 상상들을 글로 계속해서 남겼죠. 그러던 어느 날, 쌓여가는 텍스트 파일 아래 표시된 용량을 보게 되었어요. 킬로바이트(KB). 그 숫자가 제게는 꽤나 무겁게 다가왔습니다.
"누구에게 보여줄 목적의 글은 아니었지만, 그 안에는 제 자신이 진실하고 온전하게 담겨 있었어요. 그렇게 저의 기록은 아무도 모르게 조용히 무거워지고 있었습니다."
그때부터 ‘아무도 읽지 않을 글’, ‘들려주지 않을 음악’, ‘보여주지 않을 그림’에 대해 생각하기 시작했어요. 독자도 관객도 만나지 못한 채 사라져가는 존재들을 떠올리면 마음 한구석이 이상하게 슬펐습니다.
저는 이 사적인 기록들을 디지털 공간에만 남겨두고 싶지 않았어요. 이미지와 물질의 형태로, 나아가 실재하는 '무게'를 가진 존재로 옮겨보고 싶었죠. 킬로바이트(KB)로 존재하던 희미한 이야기들이 킬로그램(kg)이라는 물리적 무게를 지닌 존재로 이사하는 것. 그 장소의 이동이 바로 제 작업, Isa(이사) 시리즈입니다.
04. 번역하지 않은 제목, 언어의 간극
Q. 'Isa' 시리즈에서 영어가 아닌 한국어 ‘이사’를
그대로 사용하신 특별한 이유가 있나요?
미국에서 전시를 준비하며 결심한 게 하나 있었어요. 일부러 한국어 제목과 한글 텍스트를 사용하는 것이었죠. 사실 그동안 타국에서 생활하며 언어 때문에 느꼈던 일종의 '간극'이 있었거든요.
현지 사람들은 '이사(Isa)'라는 단어를 소리 내어 발음할 수는 있겠지만, 그 단어가 품고 있는 정서와 의미의 층위까지 완벽하게 이해하기는 어렵습니다. 저는 바로 그 지점, 사람들 사이의 언어적 거리와 그로 인해 발생하는 ‘간극 혹은 잉여’를 작업 속에서 느끼게 하고 싶었습니다.
단순히 의미를 전달하는 것이 목적이었다면 'Moving'이라는 단어를 썼을 거예요. 하지만 저는 번역이라는 필터를 거치지 않은 ‘이사’라는 단어를 그대로 사용함으로써, 소통의 한계와 그 낯선 감각을 작품의 일부로 남겨두고 싶었습니다.
05. 엄마와 아티스트, 삶과 예술의 강도를 맞추는 균형
Q. 엄마이자 아티스트로 살아간다는 것
엄마이자 아티스트로 살아가는 일에는 분명 시간적인 한계가 있습니다. 그림은 공간과 시간이 필요한 작업이기 때문에 아이를 키우는 동안에는 작업을 계속 이어가는 것이 쉽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저는 무언가에 목마를 때 책을 많이 읽었습니다.
책은 아이를 재우면서도, 누워서도, 밥을 지으면서도 볼 수 있으니까요. 그때는 작품과 무관한 일을 하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돌이켜보니 ‘활자’라는 것에 끌려 ‘Isa 시리즈’를 했던 것도 이와 연결되어 있었네요.
제가 좋아하는 정직성 작가님이 하신 말씀이 있습니다. 작품을 지나치게 예술지상주의적으로 생각하면 너무 고귀해서 할 수 없고, 반대로 별것 아닌 것으로 생각하면 너무 하찮게 느껴져서 역시 할 수 없다는 말이었습니다.
‘예술을 삶을 살아가는 일과 동등한 위치에 두고 균형을 잘 잡으면 계속할 수 있다’는 그 말이 제게는 매우 실제적인 조언이 되었습니다. 그래서 지금도 저는 엄마이자 작가로서, 삶을 살아내는 일과 같은 강도로 균형을 맞추며 작업하려고 노력하고 있습니다. 그저 주어진 하루의 일과에 그 일이 조금 들어 있을 뿐이라고 생각하는 거예요. 그러면 제 자신을 특별하다고 여기지 않으면서도, 겸손하게 엄마이자 작가로서 제 몫의 일을 해나갈 수 있는 것 같습니다.
06. BYS라는 동력 : 일상을 예술로 바꾸는 ‘기록과 루틴’의 힘
Q. BYS는 민영님에게 어떤 의미와 영향을 주었나요?
BYS에서 강조하는 루틴은 제 삶에 방향을 제시했습니다. "그림 그릴 공간이 없다, 시간이 부족하다"는 핑계를 접기로 했죠. 아이들이 잠든 밤 10시 이후, 다이닝 테이블을 작업 테이블로 사용하기로 결심했습니다.
9시 40분쯤부터 집을 정리하며 마음을 가다듬고, 밤 10시 정각이 되면 그곳은 제게 예술을 펼치는 작업실이 되었어요. 이 루틴을 1년 정도 유지하면서, 작업과 훈련을 멈추지 않고 이어갈 수 있었습니다.
또한 BYS 특유의 기록 문화는 제 작업 방식과 무척 닮아 있었어요. 영어 훈련 과정을 영상과 기록으로 남기면, 시간이 흐른 뒤 그것은 한 사람의 시간과 성장의 흔적으로 남게 됩니다.
"디지털 공간에만 머물던 기록들을 현실의 작품으로 옮겨왔던 제 작업처럼, BYS의 기록 역시 사람의 시간과 성장을 눈에 보이는 형태로 보여주는 축적이라고 느꼈습니다."
최근에는 ‘삽질 클럽’ 리더로 참여하며 머릿속에만 머물던 생각들을 실제 행동으로 옮기는 연습을 하고 있습니다. 나와 비슷한 질문을 가진 사람들과 작업 현황을 나누고 대화하는 과정은, 제 생각과 작업을 다시금 선명하게 정리해 주는 소중한 시간이 되고 있습니다.
07. 최근의 탐구 : 조선 고지도가 그려낸 세계
Q. 요즘 민영 님의 시선이 머무는 작업은 무엇인가요?
최근에는 조선 시대에 사용되었던 고지도들에 매료되어 작업을 하고 있어요. 조선 반도의 고대 지도들을 들여다보면 오늘날의 지도와는 다른 흥미로운 지점이 보이거든요.
이 지도들은 객관적인 수치나 정확성보다, 사람이 세상을 어떻게 이해하고 받아들였는지에 따라 그 세계를 주관적으로 표현해요. 내 삶에 중요한 장소는 크게 그리고, 잘 모르는 곳은 과감히 비워두거나 자연물로 대체해서 그려 넣기도 하죠. 자기가 이해하지 못한 세계는 아직 다다르지 못한 섬 정도로만 남겨둡니다.
저는 이 모든 방식이 굉장히 예술적으로 느껴졌어요. ‘내가 알고 이해하는 만큼이 곧 나의 세계’라는 고지도의 철학이, 제가 그동안 관심을 가지고 있던 집, 이사, 그리고 기록이라는 주제들과도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저의 작업도 제가 거쳐온 시간과 장소들을 저만의 지도로 그려나가는 과정이니까요.
08. 아름다움에 이끌렸던 시선, 삶의 풍성함으로
Q. 민영 님의 작업을 보면 보이지 않거나
주목 받지 못하는 것들에. 머무는 시선이 느껴져요.
왜 그런 대상들에 끌리시는 걸까요?
사실 이 질문이 저에게는 참 어려워요. 무언가에 시선이 끌리는 데에 명확한 이유가 없는 것 같아요. 어떤 의도를 가지고 시선을 둔 적은 없고, 결코 작업을 하기 위해 무언가를 보고 싶지는 않아요.
그저 아주 자연스럽게 눈길이 빼앗기곤 합니다. 학교에서는 청소 노동자의 걸음걸이에, 서울 도심에서는 노숙자의 옷차림에 시선이 멈춰 사진을 모아두기도 했죠. 미국에 살 때는 물려받은 옷이나 한참 빨지 않은 옷을 입은 사람들을 보면 왠지 기분이 좋았어요. 이후에는 온갖 텍스트와 평면도, 공간 같은 것들이 제 시선을 끌었고요.
시간이 흐르며 그 관심이 '존재 가치를 잃은 구체적인 대상'으로 옮겨가긴 했지만, 딱히 이유가 있었던 건 아니었습니다. 그저 자주 보아왔던 것에 마음이 먼저 가게 된 것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다만 분명한 믿음은 있어요. ‘우리의 양심이 알아보고 서로 동의할 수 있는 분명한 아름다움’이 존재한다는 사실 말이에요. 제가 지금 사는 곳은 오래된 가치와, 그로부터 탈출하는 시도가 익숙한 세상이에요.
최근 이런 문장에 밑줄을 그었습니다.
“예술이 아니라 아름다움이어야 한다. 우리가 틀렸던 대목이다.”
- 심상용, 『예술을 무엇이라 할 것인가』
정말 공감해요. '예술적인 시선'은 제 삶을 행복하게 하는 데 큰 도움이 되지 않았어요. 하지만 ‘아름다움에 이끌렸던 시선들’은 그 대상이 무엇이었던 간에 제 삶을 풍성하게 만들어 주었습니다.
09. 예술의 정의 : 나를 돕기 위해 곁에 머무는 고마운 존재
Q. 민영 님에게 예술은 어떤 의미인가요?
삶 속에서 예술은 어떤 역할을 하고 있다고 느끼시나요?
저는 예술에게 항상 고마운 마음이에요. 제 삶이 스스로 던진 질문들에 침묵할 때, 예술은 제가 마음을 열기만 하면 언제나 대답을 들려주었어요. 힘이 들 때, 그림도 음악도 글도 언제나 짧게나마 저에게 말을 건네주었어요. 그래서 저는 예술과 언제까지나 함께하고 싶습니다.
저희 아이들이 한글 공부를 힘들어할 때면 늘 이렇게 말해주곤 해요.
“글자는 하나님께서 우리를 도우라고 보내주신 고마운 종이란다.”
예술도 이와 꼭 같다고 믿어요. 예술이 마냥 쉽기만 한 건 아니지만, 그렇다고 우리가 예술 앞에서 쩔쩔매거나 잘 보일 이유도 없지요. 예술은 언제까지나 우리를 돕기 위해 존재하는 것이니까요. 그래서 저는 예술을 고마운 존재로 여기며 사랑해요. 하지만 종이 주인보다 앞설 수는 없다고 생각해요.
“예술이 내 삶에서 멋진 일을 할 수 있도록 나는 어떤 사람이 되어야 할까.”
그 질문을 계속 마음에 두고 살아가고 있습니다.
10. 모든 여정의 시작, ‘호기심(Curiosity)’
Q. 지금까지 삶을 돌아볼 때, 민영 님을 가장 잘 설명하는
단어 하나를 꼽는다면 무엇일까요?
주변 분들에게 자주 이야기하곤 하는데요, 저를 가장 잘 설명하는 단어는 역시 ‘Curiosity(호기심)’입니다.
미국에서의 낯선 생활도, 킬로바이트의 텍스트를 물질의 무게로 옮기는 작업도, 그리고 지금 한국에서 마주하는 새로운 일상과 작업들까지. 이 모든 일의 시작에는 항상 호기심이 가장 중요한 역할을 했기 때문입니다.
무언가를 더 알고 싶고, 조금 더 가까이에서 보고 싶었던 마음이 작업과 삶의 방향을 이끌어 왔습니다. 저는 지금도 여전히, 세상을 더 깊이 알아가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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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pyright Ⓒ2022.BE THE LIGHT. All rights reserved.
01. Recent Life : 한국이라는 낯선 익숙함에 적응하는 법
Q. 요즘 어떤 삶을 살고 계신가요?
미국 미시간에서 8년을 살다 작년 7월 한국으로 돌아왔습니다. 돌아온 지 1년이 채 되지 않은 지금, 몸에 배어버린 타국의 생활 방식과 한국의 현실 사이를 다시 맞추어 가는 중입니다. 개인 작업을 지속하며 여러 지원 프로그램에 도전하고, 대안학교 아이들에게 미술을 가르치며 새로운 일상의 뿌리를 내리고 있습니다.
02. Definition of 'Home' : 삶의 여정처럼 끊임없이 움직이는 동사
Q. 민영님에게 ‘집’은 어떤 의미인가요?
제가 '집'이라는 주제로 작업을 시작한 건 한국에 오기 전이었어요. 보통 사람들은 집을 고정된 장소나 안정된 공간으로 생각하지만, 저에게 집의 의미는 조금 달랐어요. 저에게 집은 고정된 형태라기보다 하루하루를 살아내는 과정에 가깝습니다. 기억도, 형태도, 실제 삶도 계속 달라지기 때문에 집은 하나의 장소라기보다 끊임없이 이어지는 여정처럼 느껴졌거든요.
어쩌면 이런 관점은 삶을 완성된 상태가 아니라 계속 성장하고 이동하는 여정으로 바라보는 BYS의 태도와도 참 닮아 있는 것 같아요.
03. Isa 시리즈의 탄생 : 킬로바이트(KB)의 문장이 킬로그램(kg)의
존재가 되기까지
Q. Isa 시리즈는 어떻게 시작되었나요?
미국에서의 시간은 제게 침묵의 시간이기도 했어요. 언어의 장벽 때문에 머릿속엔 많은 생각들이 있어도 대화 속에서 표현할 수 있는 말이 거의 없었거든요. 갈 곳 잃은 말들을 품고 집으로 돌아오면, 저는 그날의 일과 생각들을 글로 써내려 갔습니다.
특히 막내 아이가 태어나고 첫 1년은 그림에 대한 갈증이 가장 깊었던 시기였어요. 무언가 그릴 상황은 안 됐기에 대신 “나라면 이렇게 그렸을 텐데.”라는 상상들을 글로 계속해서 남겼죠. 그러던 어느 날, 쌓여가는 텍스트 파일 아래 표시된 용량을 보게 되었어요. 킬로바이트(KB). 그 숫자가 제게는 꽤나 무겁게 다가왔습니다.
"누구에게 보여줄 목적의 글은 아니었지만, 그 안에는 제 자신이 진실하고 온전하게 담겨 있었어요. 그렇게 저의 기록은 아무도 모르게 조용히 무거워지고 있었습니다."
그때부터 ‘아무도 읽지 않을 글’, ‘들려주지 않을 음악’, ‘보여주지 않을 그림’에 대해 생각하기 시작했어요. 독자도 관객도 만나지 못한 채 사라져가는 존재들을 떠올리면 마음 한구석이 이상하게 슬펐습니다.
저는 이 사적인 기록들을 디지털 공간에만 남겨두고 싶지 않았어요. 이미지와 물질의 형태로, 나아가 실재하는 '무게'를 가진 존재로 옮겨보고 싶었죠. 킬로바이트(KB)로 존재하던 희미한 이야기들이 킬로그램(kg)이라는 물리적 무게를 지닌 존재로 이사하는 것. 그 장소의 이동이 바로 제 작업, Isa(이사) 시리즈입니다.
04. 번역하지 않은 제목, 언어의 간극
Q. 'Isa' 시리즈에서 영어가 아닌 한국어 ‘이사’를
그대로 사용하신 특별한 이유가 있나요?
미국에서 전시를 준비하며 결심한 게 하나 있었어요. 일부러 한국어 제목과 한글 텍스트를 사용하는 것이었죠. 사실 그동안 타국에서 생활하며 언어 때문에 느꼈던 일종의 '간극'이 있었거든요.
현지 사람들은 '이사(Isa)'라는 단어를 소리 내어 발음할 수는 있겠지만, 그 단어가 품고 있는 정서와 의미의 층위까지 완벽하게 이해하기는 어렵습니다. 저는 바로 그 지점, 사람들 사이의 언어적 거리와 그로 인해 발생하는 ‘간극 혹은 잉여’를 작업 속에서 느끼게 하고 싶었습니다.
단순히 의미를 전달하는 것이 목적이었다면 'Moving'이라는 단어를 썼을 거예요. 하지만 저는 번역이라는 필터를 거치지 않은 ‘이사’라는 단어를 그대로 사용함으로써, 소통의 한계와 그 낯선 감각을 작품의 일부로 남겨두고 싶었습니다.
05. 엄마와 아티스트, 삶과 예술의 강도를 맞추는 균형
Q. 엄마이자 아티스트로 살아간다는 것
엄마이자 아티스트로 살아가는 일에는 분명 시간적인 한계가 있습니다. 그림은 공간과 시간이 필요한 작업이기 때문에 아이를 키우는 동안에는 작업을 계속 이어가는 것이 쉽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저는 무언가에 목마를 때 책을 많이 읽었습니다.
책은 아이를 재우면서도, 누워서도, 밥을 지으면서도 볼 수 있으니까요. 그때는 작품과 무관한 일을 하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돌이켜보니 ‘활자’라는 것에 끌려 ‘Isa 시리즈’를 했던 것도 이와 연결되어 있었네요.
제가 좋아하는 정직성 작가님이 하신 말씀이 있습니다. 작품을 지나치게 예술지상주의적으로 생각하면 너무 고귀해서 할 수 없고, 반대로 별것 아닌 것으로 생각하면 너무 하찮게 느껴져서 역시 할 수 없다는 말이었습니다.
‘예술을 삶을 살아가는 일과 동등한 위치에 두고 균형을 잘 잡으면 계속할 수 있다’는 그 말이 제게는 매우 실제적인 조언이 되었습니다. 그래서 지금도 저는 엄마이자 작가로서, 삶을 살아내는 일과 같은 강도로 균형을 맞추며 작업하려고 노력하고 있습니다. 그저 주어진 하루의 일과에 그 일이 조금 들어 있을 뿐이라고 생각하는 거예요. 그러면 제 자신을 특별하다고 여기지 않으면서도, 겸손하게 엄마이자 작가로서 제 몫의 일을 해나갈 수 있는 것 같습니다.
06. BYS라는 동력 : 일상을 예술로 바꾸는 ‘기록과 루틴’의 힘
Q. BYS는 민영님에게 어떤 의미와 영향을 주었나요?
BYS에서 강조하는 루틴은 제 삶에 방향을 제시했습니다. "그림 그릴 공간이 없다, 시간이 부족하다"는 핑계를 접기로 했죠. 아이들이 잠든 밤 10시 이후, 다이닝 테이블을 작업 테이블로 사용하기로 결심했습니다.
9시 40분쯤부터 집을 정리하며 마음을 가다듬고, 밤 10시 정각이 되면 그곳은 제게 예술을 펼치는 작업실이 되었어요. 이 루틴을 1년 정도 유지하면서, 작업과 훈련을 멈추지 않고 이어갈 수 있었습니다.
또한 BYS 특유의 기록 문화는 제 작업 방식과 무척 닮아 있었어요. 영어 훈련 과정을 영상과 기록으로 남기면, 시간이 흐른 뒤 그것은 한 사람의 시간과 성장의 흔적으로 남게 됩니다.
"디지털 공간에만 머물던 기록들을 현실의 작품으로 옮겨왔던 제 작업처럼, BYS의 기록 역시 사람의 시간과 성장을 눈에 보이는 형태로 보여주는 축적이라고 느꼈습니다."
최근에는 ‘삽질 클럽’ 리더로 참여하며 머릿속에만 머물던 생각들을 실제 행동으로 옮기는 연습을 하고 있습니다. 나와 비슷한 질문을 가진 사람들과 작업 현황을 나누고 대화하는 과정은, 제 생각과 작업을 다시금 선명하게 정리해 주는 소중한 시간이 되고 있습니다.
07. 최근의 탐구 : 조선 고지도가 그려낸 세계
Q. 요즘 민영 님의 시선이 머무는 작업은 무엇인가요?
최근에는 조선 시대에 사용되었던 고지도들에 매료되어 작업을 하고 있어요. 조선 반도의 고대 지도들을 들여다보면 오늘날의 지도와는 다른 흥미로운 지점이 보이거든요.
이 지도들은 객관적인 수치나 정확성보다, 사람이 세상을 어떻게 이해하고 받아들였는지에 따라 그 세계를 주관적으로 표현해요. 내 삶에 중요한 장소는 크게 그리고, 잘 모르는 곳은 과감히 비워두거나 자연물로 대체해서 그려 넣기도 하죠. 자기가 이해하지 못한 세계는 아직 다다르지 못한 섬 정도로만 남겨둡니다.
저는 이 모든 방식이 굉장히 예술적으로 느껴졌어요. ‘내가 알고 이해하는 만큼이 곧 나의 세계’라는 고지도의 철학이, 제가 그동안 관심을 가지고 있던 집, 이사, 그리고 기록이라는 주제들과도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저의 작업도 제가 거쳐온 시간과 장소들을 저만의 지도로 그려나가는 과정이니까요.
08. 아름다움에 이끌렸던 시선, 삶의 풍성함으로
Q. 민영 님의 작업을 보면 보이지 않거나
주목 받지 못하는 것들에 머무는 시선이 느껴져요.
왜 그런 대상들에 끌리시는 걸까요?
사실 이 질문이 저에게는 참 어려워요. 무언가에 시선이 끌리는 데에 명확한 이유가 없는 것 같아요. 어떤 의도를 가지고 시선을 둔 적은 없고, 결코 작업을 하기 위해 무언가를 보고 싶지는 않아요.
그저 아주 자연스럽게 눈길이 빼앗기곤 합니다. 학교에서는 청소 노동자의 걸음걸이에, 서울 도심에서는 노숙자의 옷차림에 시선이 멈춰 사진을 모아두기도 했죠. 미국에 살 때는 물려받은 옷이나 한참 빨지 않은 옷을 입은 사람들을 보면 왠지 기분이 좋았어요. 이후에는 온갖 텍스트와 평면도, 공간 같은 것들이 제 시선을 끌었고요.
시간이 흐르며 그 관심이 '존재 가치를 잃은 구체적인 대상'으로 옮겨가긴 했지만, 딱히 이유가 있었던 건 아니었습니다. 그저 자주 보아왔던 것에 마음이 먼저 가게 된 것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다만 분명한 믿음은 있어요. ‘우리의 양심이 알아보고 서로 동의할 수 있는 분명한 아름다움’이 존재한다는 사실 말이에요. 제가 지금 사는 곳은 오래된 가치와, 그로부터 탈출하는 시도가 익숙한 세상이에요.
최근 이런 문장에 밑줄을 그었습니다.
“예술이 아니라 아름다움이어야 한다. 우리가 틀렸던 대목이다.”
- 심상용, 『예술을 무엇이라 할 것인가』
정말 공감해요. '예술적인 시선'은 제 삶을 행복하게 하는 데 큰 도움이 되지 않았어요. 하지만 ‘아름다움에 이끌렸던 시선들’은 그 대상이 무엇이었던 간에 제 삶을 풍성하게 만들어 주었습니다.
09. 예술의 정의 : 나를 돕기 위해 곁에 머무는 고마운 존재
Q. 민영 님에게 예술은 어떤 의미인가요? 삶 속에서
예술은 어떤 역할을 하고 있다고 느끼시나요?
저는 예술에게 항상 고마운 마음이에요. 제 삶이 스스로 던진 질문들에 침묵할 때, 예술은 제가 마음을 열기만 하면 언제나 대답을 들려주었어요. 힘이 들 때, 그림도 음악도 글도 언제나 짧게나마 저에게 말을 건네주었어요. 그래서 저는 예술과 언제까지나 함께하고 싶습니다.
저희 아이들이 한글 공부를 힘들어할 때면 늘 이렇게 말해주곤 해요.
“글자는 하나님께서 우리를 도우라고 보내주신 고마운 종이란다.”
예술도 이와 꼭 같다고 믿어요. 예술이 마냥 쉽기만 한 건 아니지만, 그렇다고 우리가 예술 앞에서 쩔쩔매거나 잘 보일 이유도 없지요. 예술은 언제까지나 우리를 돕기 위해 존재하는 것이니까요. 그래서 저는 예술을 고마운 존재로 여기며 사랑해요. 하지만 종이 주인보다 앞설 수는 없다고 생각해요.
“예술이 내 삶에서 멋진 일을 할 수 있도록 나는 어떤 사람이 되어야 할까.”
그 질문을 계속 마음에 두고 살아가고 있습니다.
10. 모든 여정의 시작, ‘호기심(Curiosity)’
Q. 지금까지 삶을 돌아볼 때, 민영 님을 가장 잘
설명하는 단어 하나를 꼽는다면 무엇일까요?
주변 분들에게 자주 이야기하곤 하는데요, 저를 가장 잘 설명하는 단어는 역시 ‘Curiosity(호기심)’입니다.
미국에서의 낯선 생활도, 킬로바이트의 텍스트를 물질의 무게로 옮기는 작업도, 그리고 지금 한국에서 마주하는 새로운 일상과 작업들까지. 이 모든 일의 시작에는 항상 호기심이 가장 중요한 역할을 했기 때문입니다.
무언가를 더 알고 싶고, 조금 더 가까이에서 보고 싶었던 마음이 작업과 삶의 방향을 이끌어 왔습니다. 저는 지금도 여전히, 세상을 더 깊이 알아가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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