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ROLOGUE:
[한 폭이 되기 전, 흩어진 조각들]
조각보는 한 천에서 잘려 나온 것이 아닙니다.
여러 옷, 여러 시간, 여러 사람의 손을 거쳐 떨어져 나온 조각들입니다.
그리고 그 조각들이 모여 한 폭의 조각보가 됩니다.
여기, 자기 땅 한 평 갖지 않은 정원사가 있습니다.
그녀가 거쳐온 정원은 한 곳이 아닙니다. 임대했던 작은 나대지부터 특수학급 교실, 전국의 민간정원, 그리고 바다 건너 유럽의 정원들까지. 그녀가 일한 자리는 모두 누군가의 정원이었고, 한 번도 자기 땅이었던 적이 없습니다.
"나는 오늘도 내 땅 없는 정원사라 서글프기보다, 세상 모든 정원을 내 배움터로 삼을 수 있어 다행이라 생각한다."
‘내 땅 없는 현실 가드너’ 이보현. 그녀가 정성껏 가꿔온 인생의 정원 조각보를 펼쳐봅니다.
조각 1. 덕구리난과 화분의 크기
"저는 정원사로 일하고 있어요. 일반적으로 정원사라면, 본인 정원을 가꾼다고 생각할 텐데,사실 저는 제 땅이 없거든요."
제주도 여미지 식물원에는 높이 솟은 덕구리난이 있다. 화분에 심긴 그 작은 식물이 넓은 토양에 놓이자 키가 훌쩍 자라났다. 커다란 덕구리난 앞에서 그녀는 압도 당한 채 한참을 서 있었다. 그날 이후 그녀는 화분의 크기에 대해 생각했다. 누가 누구를 어떤 화분에 가두어 두었는지, 그리고 나의 화분의 크기는 어떠한지. 나를 담는 화분의 크기를 스스로 정하기로 한 사람의 첫 한 줄, ‘내 땅 없는 현실 가드너’.
Q1. 인스타그램 바이오에 적힌 “내 땅 없는 현실 가드너” 이 한 줄이 궁금해서 인터뷰를 청하게 됐어요. 어떤 의미가 담겨 있나요?
저는 정원사로 일하고 있는데요. 일반적으로 정원사라면, 본인 정원을 가꾼다고 생각할 텐데 사실 저는 제 땅이 없거든요. 그래서 남의 정원을 만들거나 가꾸고, 탐방하는 일이 많은데 이런 정체성에 고민을 하다가 저의 상황을 있는 그대로 표현해보고자 인스타그램 바이오에 이렇게 적었답니다. 저도 남들처럼 일반적인 직장인으로 사회생활을 시작했어요. 그러다 30대 초반에 '내가 뭘 해 먹고살아야 되나' 고민이 많아서 이런저런 시도를 하다가 우연찮게 식물 관련된 일을 접하게 됐구요. 근데 일은 재밌어서 계속 하고 싶은데, 전공자가 아니다 보니 알 수 없는 갈증에 시달리다 아예 학교를 다시 들어갔어요. 4년제는 이미 나왔으니 굳이 또 갈 필요는 없었고, 뭔가 실무적인 걸 배우고 싶어서 알아보니 식물원을 갖고 있는 전문 대학이 있다는 걸 알게 되었고, 바로 그 전문대로 편입학을 하게 되었죠. 그렇게 2년을 공부하고 나니 욕심이 더 생겨서 대학원에도 들어갔고, 조경학과를 전공하게 되었답니다. 그리고 지금도 내 땅은 없지만 가드너로서 열심히 살아가고 있습니다.
Q2. 식물을 직접 가꾸며 삶에 대해 배우게 된 가장 큰 가르침이 있다면요?
식물은 저희보다 인류에 먼저 존재했기에, 저희 업계에서는 '식물은 인간보다 먼저 존재했고 선배다, 더 많은 진화 과정을 거쳐서 우리보다 더 똑똑하다' 이런 얘기를 하고는 해요. 그래서 식물한테 항상 가르침을 받죠.
혹시 덕구리난이라는 식물 아세요? 저는 항상 화분 안에 들어가 있는 것만 보다가 제주도에 여미지 식물원에 가서 정말 키가 엄청 큰 덕구리난을 봤어요. 이 식물이 원래 환경에 맞게 자라면 이렇게 자랄 수 있는 아이인데 화분에 들어가 있어서 이 정도로밖에 못 자라는구나, 하는 걸 느꼈답니다. '이게 자기에게 맞는 환경이라는 게 있구나. 또 우리가 누군가를 그 틀 안에 가두려는 것도 내 삶에 분명히 존재했었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어요. 그 사람 자체에 대한 존중이 뒷받침되어야 되는데, 다르다는 이유로 틀리다고 생각했던 편견들도 많이 있지 않았나. 정확하게 무슨 기분인지는 모르겠는데, 요만한 작은 화분 안에 있던 애를 식물원에 가서 처음 본 순간 압도당하는 느낌을 많이 받았던 것 같아요.
조각 2. 정원사가 된 결정적 순간 — 나대지에서 움튼 생명의 꽃
"제가 아무것도 신경 쓰지 못했는데도 식물들이 자라나 있었고, 그 모습을 보면서 — 이거 되게 재미있는 일이고, 내가 느꼈던 이 감동을 다른 사람들도 느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어요."
임대한 작은 나대지에 씨를 뿌리고 1년을 내버려 두었다. 다음 해 그 자리는 꽃밭이 되어 있었다. 아무 신경을 쓰지 못한 사이에도 식물들은 생명을 피워냈다. 이 감동을 다른 사람들도 느끼기를 바라는 마음 — 바로 정원사가 태어나는 순간이었다. 그녀가 처음 식물 수업을 한 곳은 일반 학교의 특수 학급이었다. 식물이 사람을 돌보고 사람이 식물을 살피는 일. 그녀의 모든 정원은 서로를 향한 보살핌의 응답에서 시작된다.
Q3. 안정적인 직장에서 자연과 식물로 진로를 바꾸는 게 쉽지 않으셨을 텐데, 결정적 장면이 있으셨어요?
그때 제가 가꿀 수 있는 조그마한 나대지 같은 땅을 임대했었는데, 거기에 식물을 심기는 했는데 사실은 1년 동안 방치를 했어요. 근데 다음 해가 됐는데 거기가 다시 꽃밭이 된 거예요. 제가 아무것도 신경쓰지 못했는데도 식물들이 자라나 있었고, 그 모습을 보면서 '이거 되게 재미있는 일이고, 내가 느꼈던 이 감동을 다른 사람들도 느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어요. 그래서 '이거 제대로 한번 해봐야겠다' 하고 미친 듯이 이쪽 일을 파고들었던 것 같아요.
Q4. 첫 식물일이 지적 장애 특수 학급 원예 수업이었다고 들었어요. 그 경험이 정원사 이보현의 가치관에 어떤 씨앗이 됐을까요?
제가 식물 일을 한다는 걸 듣고 일반 학교의 특수 학급 담당 교사였던 친구가, '본인 반 학생들에게 식물을 통한 수업을 해줄 수 있냐'고 해서 시작하게 됐어요. 그렇게 선생님들의 추천이 이어져 학교는 바뀌었지만 6~7년 정도 계속 그 일을 했어요. 용인 지역 쪽에서는 꽤 오래 수업했었죠.
그 당시에 기억나는 에피소드 두 가지 있었는데요. 하나는 아예 말을 못하고 저랑 상호 교류가 안 되던 친구가 1년 정도 지나고 나서는 먼저 인사를 하고, 정말 바뀌었다는 게 제 눈에 보일 정도로 너무 상태가 호전된 거예요. 담임 선생님도 '얘가 이런 애가 아닌데, 선생님 덕분에 이렇게 바뀌었다'고 얘기해 주시기도 했고요.
또 하나는 그 당시 저는 프리랜서로 일하고 있어서 누군가 나를 찾아주고 반겨주는 일이 너무 고마웠어요. 회사는 사실 '이 과장, 이 대리' 그러면서 계속 나를 찾으니까 오히려 안 찾았으면 좋겠는데, 프리랜서 입장에서는 누군가 나를 찾아주는 게 너무 감사한 일이잖아요. 근데 특수 학급 친구들은 항상 제가 오는 걸 기다려주고, 같이 사진 찍고 가자고 해주더라구요. 일을 통해 얻는 보람 중에 돈을 버는 것도 있지만, 나라는 존재를 확인시켜준 그 친구들 덕분에 제가 갖고 있는 기술로 교류도 할 수 있었고, 한편으로는 제가 힐링도 받을 수 있었어요. 그래서 아무리 바쁘고 낮은 예산에도 매 학기 어떻게든 하려고 노력했던 일이었어요.
Q5. 그 친구들에게 식물이 새로운 경험이었던 걸까요?
비록 식물이라는 게 우리 주변에 항상 있긴 하지만, 그걸 직접적으로 '이렇게 즐기면 돼', '이 식물은 이렇게 케어하는 거야'라고 알려준 사람들이 없었을 거에요. 근데 그걸 딱딱하게 접근한 게 아니고 '이 식물은 이런 향이 나' 하면서 실제로 만져보게 하고, 느껴보도록 도와준 것이 촉각이 예민하고 겁도 많은 친구들에게 새로운 걸 시도해보는 하나의 즐거움이 되었다고 생각해요.
조각 3. 박카스, 그리고 전국 민간 정원
"내가 이만큼 노력한 정원을 보여주고 싶은, 그러니까 그 아름다운 순간을 공유하고 싶은 분들이 많이 계셨어요."
2024년 봄, 그녀는 트렁크에 박카스 박스를 실은 채 전국을 돌아다닌다. 남해, 통영, 여수, 여주. 정원주는 대부분 어르신이다. 정원 한쪽에는 정원주가 평생 가꿔온 생명들이 한창이다. 박카스를 내미는 학생을 어르신은 예쁘게 봐주신다. 자기 땅이 없는 정원사가 누군가의 정원에 들어서며 배움을 청하는 인사다. 개인의 사적 애정을 모두가 볼 수 있는 민간정원들. 그녀는 30개가 넘는 민간 정원을 거니며 자신만의 조각보 정원을 만들어간다.
Q6. 2024년 봄, 박카스를 싣고 전국 민간정원을 누비셨죠. 몇 군데나 가신 걸까요?
못해도 30군데 이상은 들렀을 것 같아요. 제 석사 졸업 논문이 ‘산림청 등록 민간정원의 공공적 역할에 관한 연구 : 개인주택형 민간정원을 중심으로’ 인데요. 정원은 사실 과거부터 굉장히 개인적인 공간인데, 그런 개인적인 공간을 대중에게 오픈 시에 여러모로 지원하는 제도를 우리나라 산림청에서 만들었거든요. 그걸 '민간정원'이라는 말로 표현해요. 근데 저는 그게 궁금했어요. '왜 이 사람들이 본인의 개인 땅을 굳이 남한테 오픈을 할까?' 그래서 그 이유에 대해서 학술적으로 써보고 싶어서 전국에 있는, 개인만의 공간에서 사적으로 즐기던 정원이 민간정원으로 등록되어 대중에게 오픈된 공간들을 찾아가, 정원주분들을 한 분 한 분 인터뷰했어요. 가까우면 경기도 여주부터 멀리는 남해, 통영, 여수까지 정말 태어나서 처음 가본 데도 있을 정도로 전국을 돌았어요. 정원주분들은 어르신들이 많으셨는데, 제가 정원에 관심을 갖고 인터뷰를 가니 저를 더 예쁘게 봐주셨어요. 그렇게 시간을 내주셔서 인터뷰 해주신 것에 뭔가 보답을 해드리고 오고는 싶은데 돈을 드리기도 뭐하고, 뭐가 좋을까 고민하다가 — 그 박카스 한 박스가 주는 이미지가 강하잖아요. '이걸로 하자' 그래서 트렁크에 박카스를 싣고 전국을 돌아다니면서 인터뷰를 했어요.
Q7. 정원주분들이 자기 정원을 개방하신 이유가 뭐였을까요?
각 지자체에서 민간정원 등록 개수에 대한 경쟁이 있는 것 같더라구요. 그래서 직접 담당자들이 정원주 분들을 찾아가 '등록하시면 혜택이나, 나중에 지원도 받으실 수 있고 좋을 거예요'라고 해서 등록한 분들도 계시죠. 근데 정원이라는 게 예쁜 때가 정해져 있잖아요. 그 예쁜 거, 내가 이만큼 노력한 정원을 보여주고 싶은, 그러니까 그 아름다운 순간을 공유하고 싶은 분들이 많이 계셨어요. 그래서 ‘더 많은 사람들이 편안하게 찾아와서 나의 정원을 함께 즐기면 어떨까’라는 생각으로 오픈하시는 분들도 꽤 많으셨고요. 물론 그에 따른 귀찮음, 운영의 불편함, 정말 불쑥 내 정원으로 찾아와 곤혹스러운 경우도 있고, 생각보다 지원도 안 되는 부분도 있었지만 — 그분들이 그렇게 오픈해 주셨으니까 제가 찾아갈 수도 있었던 거고, 숨어 있던 전국의 정원들이 수면 위로 올라올 수 있는 기회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어요.
Q8. 천리포수목원을 다섯 번이나 찾으셨어요. 매번 새로운 게 보이시나요?
일단 계절이 다르면 계속 다른 게 보여요. 작년에 갔을 때는 천리포가 목련이 유명한 곳이라 목련을 보러 갔던 거고. 같은 계절에 간다면 — 인상적인 몇 가지 포인트들이 머릿속에 있으면 '얘가 이랬는데 이만큼 퍼졌다'거나, 컬러라든가, 그런 것들이 계속 변화하는 게 눈에 보여요.
거기는 식물 전문가들에 의해 워낙 관리가 잘 되어 있고, 해안가다 보니 국내 일반적인 기후와는 달라서 더 선명한 컬러의 식물을 만날 수 있고, 다양한 수종을 만날 수 있다보니— 식물일을 하거나 좋아하는 사람들은 때마다 가는 곳이에요.
조각 4. 해외 정원 너머 언어의 갈증
"다 같이 못하면 번역 어플이라도 켤 텐데, 다 알아듣는 분위기니까 그럴 수가 없더라고요."
22년 프랑스와 네덜란드의 정원. 영어를 잘하는 일행들 사이에서 그녀는 막막한 심정으로 서 있었다. 다 같이 못하면 번역 어플이라도 켰을 텐데, 모두 알아듣는 분위기에서는 그럴 수도 없었다. 스스로의 부족함을 채우기 위하여 BYS로 들어왔다. 영어 실력을 쌓는 시간만큼이나 사람들 사이의 따스한 온기가 그녀의 내면을 채웠다. 그리고 이제 그녀는 자신이 받았던 따뜻한 공감을 누군가에게 흘려보내고 있다. 영어를 배우러 온 한 사람이, 받은 것을 다시 건네는 자리에 서기까지 — 2년의 시간.
Q9. 2022년 프랑스·네덜란드 첫 해외 답사 때 받으신 영어 충격이 BYS의 시작점이었다고 들었어요.
원래도 영어를 못한다는 건 스스로 잘 알잖아요. 근데 다른 친구들이 그렇게 잘할 거라고 생각을 못한 거예요. 제가 서울대학교 환경대학원을 나왔는데, 그렇다 보니 어느 정도는 영어가 다 되는 친구들이었던 거죠. 몇몇은 해외에서 대학을 나온 걸 알고 있어서 '쟤는 문제가 없겠지' 했는데 — 저랑 같은 국내파 친구도, 말은 잘 못하는데, 진짜 기세로 영어 하는 친구 있잖아요. 그냥 한국말로 막 말하는데도 외국인과 소통을 하고 있는 거예요. 근데 저는 사실 그런 성격이 아니어서 그게 너무 너무 스트레스, 충격이었고, 그러다 24년에 영국을 한 번 더 나갈 일이 생겼는데, '이거는 아니다, 내가 그대로 가면 안 된다' 해서 그때 BYS를 등록해서 한 3개월 조금 넘게 하고 나갔다 왔어요.
Q10. 다 같이 못하면 오히려 괜찮았을 텐데, 충격이 더 크셨겠어요.
다 같이 못하면 번역 어플이라도 켤 텐데, 다 알아듣는 분위기니까 그럴 수가 없더라고요. 근데 그렇게 억지로 눈치보며 웃다 온 시간 덕분에 제가 여기까지 왔네요.
Q11. 1.5레벨에서 시작해서 영어 훈련을 지속하고 계세요. 어떻게 계속하실 수 있었어요?
일단 '더 이상 물러날 곳이 없다'라는 생각이 제일 컸어요. 여기 오기 전에도 영어 정복을 위해 엄청 트라이를 많이 했는데 다 실패를 했어요. BYS가 처음으로 꾸준하게 다닌 영어 수업이랍니다. 2년 간 그냥 다들 하니깐, 다들 다음 레벨 가니까 가야지, 하면서 여기까지 왔어요. 사실 작년 이맘때에는 회사도 바뀌고, 지방으로 이사하면서 체력적으로 완전 바닥을 찍었거든요. 그래서 한 학기 쉬고 돌아왔는데, 첫 인터뷰도 해주고, 첫 학기 빼고 계속 담임이셨던 자스민 선생님을 다시 만나 너무 좋았어요.
Q12. BYS에서 영어 전화 트레이너와 서포터즈까지 하신다고 들었어요.
트레이너는 제가 한다고 할 수 있는 게 아니니까 제안이 먼저 들어와야 할 수 있는 건데, 감사하게 제안을 주셔서 — '내가 당연히 받은 게 있으니, 실력은 부족하지만 해보자' 하고 했던 거고요. 저도 1.5레벨 일 때, 전화 트레이닝을 받았었는데, 그 때 트레이너 분께서 제 이야기를 잘 들어주셨거든요. 그래서 저도 사람을 통해서 받았던 따뜻한 공감을 제가 트레이너를 하면서 흘려보내고 싶었어요. 서포터즈는 n차 째, 하다 보니 '이런 이야기를 콘텐츠와 연결해볼까?' 하면서 만들다 보니까 제가 영어를 하려는 동기 부여를 다시 꺼내볼 수 있게 되었고, 제가 서포터즈 콘텐츠를 통해 2년 간 BYS 다닌 걸 홍보하다 보니 주변에서도 저에 대한 믿음도 생기는 것 같구요. 어떻게 보면 저를 나타내는 하나의 수단으로서 서포터즈 활동이 잘 이용되고 있다는 느낌이 들어서, 재미있게 하고 있어요.
조각 5. 영어를 배우는 여정, 정원사의 언어로 — 숙근초
'"남들은 죽었나 라고 생각하지만 한겨울에도 뿌리는 살아서 버티고, 다음 봄에 다시 피는 과정을 반복하고 있는 게 — 저의 영어 여정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어요."
정원에는 ‘숙근초’가 있다. 꽃과 잎이 시들어 생명을 다한 것처럼 보여도 뿌리는 여전히 살아 있다. 바로 다음의 봄을 기다리며 견디어 내는 뿌리다. 숙근초는 그녀가 영어를 훈련하는 여정을 가리켜 부르는 이름이다. 매일 손길을 거치는 정원의 용어는, 그녀의 삶을 아우르는 일상의 언어가 된다.
Q13. BYS 2년의 과정을 정원사의 언어로 한번 표현해 주실 수 있어요?
식물에는 숙근초라는 개념이 있어요. 한 해만 사는 애들이 아니고, 꽃이 폈다가 사라졌다가 몇 해를 살아요. 꽃과 줄기 등의 지상부는 겨울 동안 사라져도 뿌리는 살아남아 있거든요. 그리고 그 뿌리에서 다음 해가 되면 다시 싹이 나고 꽃이 피고. 이걸 반복하는 걸 숙근초, '다년생 식물'이라고 해요. 남들은 죽었나 라고 생각하지만 한겨울에도 뿌리는 살아서 버티고, 다음 봄에 다시 피는 과정을 반복하고 있는 게 — 저의 영어 여정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어요.
Q14. 영어 원서도 이제 펼치셨다고요?
네, 영국에서 사 와서 오늘 처음, 변명 같지만 올 봄 들어 이번 주에 처음으로 여유가 생겼거든요. 클럽 활동 중에 '원서 한 페이지' 신청한 것도 있는데, 하루 한 페이지 정도면 시도해 볼 수 있겠다 싶어서 — 장식용으로 쓰던 책이 드디어 원래 기능을 찾아가고 있어요.
Q15. 다 읽고 나서 글 한번 써주실 거죠?
180페이지니까 한 6개월 정도 후에 한번 써보겠습니다. (웃음)
Q16. BYS의 생각수업과 정원사의 일이 비슷한 부분이 있다고 느끼셨던 적 있어요?
완벽하게 기억나는 건 없는데, 생각수업 주제 중에 정원이라는 키워드가 들어갔던 게 있었어요. '어떤 씨앗을 심느냐에 따라서 긍정적인 씨앗을 심으면 결과물이 긍정적으로 나오고' — 그런 식의 것들. 그래서 '당신의 정원을 어떻게 가꿔보시겠습니까?' 이런 질문이 있었던 것 같기도 하고.
생각수업 시간에 항상 정원이나 식물 케어하는 걸로 비유해서 써주시니까 감사한 마음도 있고. '정말 콩 심은 데 콩 나고, 팥 심은 데 팥 난다' —라는 걸 잊지 않고, 저 스스로도 그런 부분을 개선해야겠다고 생각을 많이 했어요. 아까 말씀드렸던 '내가 이 회사에서 뭘 하면서 어떻게 일해야 되나' 했을 때, 그걸 생각수업 덕분에 심도 있게 고민했던 것 같기도 해요. '목적이 있어야 된다, 어떤 마음으로 임할 것인가'에 대해 항상 질문을 하시다 보니까.
Q17. 다른 분들 이야기도 듣게 되시고요.
맞아요. 응원도 많이 해 주시고. 다들 제 상황을 잘 아시기도 하고, 저에게 항상 응원을 해주세요. ‘잘하고 있고, 잘 할 수 있어요. 스스로를 믿어줘요.’ 이렇게요.
Q18. 슬럼프나 시듦을 대하는 태도는 어떠세요?
식물을 워낙 많이 대하다 보니까 저희는 — '죽을 놈은 죽고, 살 놈은 산다' 약간 이런 마인드가 강해요. 죽을 놈은 어차피 이 환경과 안 맞는 애고, 살 놈만 잘 케어하면 된다. 약간 잔인한 면이라고 해야 될까요. 가지치기랑 비슷하기도 하고. '이거는 굳이 생명을 더 연장하는 데 도움이 안 된다' 라고 잘라내는 그런 것들이 있는데.
이와 같이, 제 삶도 모든 걸 다 살리고, 갖고 갈 수는 없다는 생각을 하기 시작한 것 같아요. 그전에는 저 스스로 '뭐든 다 잘해내야겠다'는 생각이 있어서 슬럼프가 왔던 것 같기도 해요. 모든 걸 다 잘하고 완벽하게 해야 된다고 생각했거든요. 근데 요즘은 '나는 이런 건 원래 안 되는 사람이구나' 라고 조금씩 인정하는 부분들이 생기다 보니, 갖고 있는 것 중에 잘하는 거에 더 포커스를 맞추려고 해요.
제 친구가 저한테 해준 말이 있어요. '너는 왜 네 인생에 그렇게 틀린 것만 보냐. 이렇게 많이 맞췄는데. 그 동그라미 친 것만 좀 봐라.' 그 말에 충격을 받고, 그 부분에 더 집중하려고 노력했던 것 같아요.
조각 6. 두 평짜리 정원과 조각보라는 이름
"이 작은 정원을 통해서도 사람들이 변화하는 모습을 보면서 — 이런 정경을 기록한 사람은 아직 없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대학원 과제에서 그녀가 떠올린 한 단어가 있다. ‘조각보’. 한국 정원의 모티브가 몬드리안의 적청황 컴포지션이라는 글에 그녀가 ‘조각보는 어떨까’ 하고 적어둔 한 줄이었다. 그녀의 이름 한 글자인 ‘보’가 ‘조각보’라는 단어와 만나는 순간. 그녀는 자신만의 정체성을 깨닫는다. 본인의 이야기들, 네 가지 자작 직업, 한두 평의 시민 정원들 — 그녀가 거쳐온 모든 조각들을 이어붙이는, 조각보의 정원이라는 것을.
Q19. 보현 님은 식물 일을 하시면서 그림가드너 · 식물도슨트 · 식터뷰 · 식물 조각보, 네 가지 자작 직업을 만드셨어요. 이런 시도들이 지금까지 어떤 영향을 끼쳤어요?
이쪽 일을 하고는 있는데, 뭔가 평범한 길은 아니잖아요. 회사원이라든가, 일반적인 커리어 패스가 아니다 보니까 — 저 혼자 뭔가 괜히 주눅이 들어서, 뭔가를 계속하고 있다는 걸 보여주고 싶었나 봐요. 사실 지금은 지워 놓기는 했지만 유튜브도 열심히 했었고. 그러다 보니 콘텐츠 만들고 기획하는 게 저에게 맞다는 것도 어느 순간 깨닫게 되고. 그냥 알리고 싶었던 것 같아요. 제가 잘 살고 있음을, 사람들한테 알리고 싶어 하는 게 있었던 게 아닐까 싶어요.
Q20. 최근에 다시 하나 시작하시려는 게 있다고요?
저도 땅이 없지만 — 대부분 많은 사람들이 자기 집은 있을지언정 정원을 갖는 건 쉽지 않잖아요. 근데 도시에 정책적으로 시민들이 만들고 관리할 수 있는 정원 공간들을 계속 확장하고 있고, 지금 제가 회사에서 하고 있는 일들도 그런 일들이라, 그런 사람들의 이야기를 써보는 것도 다수의 사람들에게 더 공감이 되지 않을까 싶었어요. 제가 만났던 정원주들은 시골 완전 지리산 속에 있거나 어디 지방에서 자기의 넓은 땅을 가꾸시는데 그건 사실은 쉽지 않은 특이 케이스고. 오히려 도시 안에 그냥 2*2m정도에 한, 두 평짜리 — 거기 와서 너무 신나게 정원일을 하시는 모습들이 저한테는 더 와닿더라고요. 처음에는 이 사이즈 정원에서 무엇을 할 수 있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었는데, 이 작은 정원을 통해서도 사람들이 변화하는 모습을 보면서 — 이런 정경을 기록한 사람은 아직 없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Q21. 그러면 두 평짜리들을 이어 붙이면 조각보 느낌이 되니까 그렇게 아이디가 만들어지신 건가요?
아, 그건 사실 그 전에 — 제가 다른 대학원 과제로 에세이를 쓰다가 '조각보'라는 표현을 썼는데, 그걸 교수님이 칭찬해 주신 거예요. 한국정원을 내걸고 만든 정원이 '몬드리안의 적청황의 컴포지션'을 모티브로 했다고 하길래, 그보다는 '조각보'라는 표현이 더 좋지 않을까 라고 썼더니, 교수님이 '이런 표현을 썼냐'고 하면서 좋아하시더라고요.
거기에 제 이름이 보현이다 보니 ‘보’를 따와서, 내 인생의 조각조각을 모아 '조각보'라는 나의 이야기를 쓰자라는 느낌으로 시작한 건데. 어쩌다 보니 컨셉이 맞은 것 같아요.
Q22. 식물을 보면서 길러진 그 세심한 눈을, 일상에서 어떻게 쓰세요?
저는 BYS 첫 시간에 자기소개를 하면 그걸 다 적어놔요. 중간 중간 대화하면서 정보를 업데이트도 하구요. 한 사람의 여정을 기억하기 위하여 써 두는데, 그게 저는 당연하다고 생각했는데 자스민 선생님이 보시고 놀라셨어요. 10주 동안 함께 할 사람이기에 저는 당연한 거였는데, 다른 분들이 보기에 세심한 일이라고 하셔서. 괜히 칭찬 받은 기분이었어요. 그리고 정원사 일을 오래 하면 관찰하는 힘이 커진다고 얘기를 해요. 식물에서 사람으로까지 관찰하는 힘이 옮아간다고. 그래서 남을 배려하고 타인의 입장을 잘 생각해 주는 사람이 될 수 있다고, 특히 어린이 정원사들에게 그렇게 많이 얘기해줘요.
Q23. 2023년 서울대공원 학생정원 공모전 당시에 '위로와 돌봄'을 주제로 수상하셨어요. 2026년의 보현 님에게도 식물을 대하는 키워드는 여전히 '위로와 돌봄'이 있을까요?
그럼요, 그 마음은 여전히 유효해요. 식물이라는 존재가 우리에게 건네는 무조건적인 위로가 있거든요. 동시에 식물은 내가 정성껏 돌봐야만 하는 존재이기도 하고요. 그런데 신기하게도 그 돌봄의 과정 속에서 결국 저 자신이 돌봄을 받고 있다는 걸 매번 깨달아요.
저희 회사 앞에 작은 정원이 하나 있거든요. 제가 작년은 입사 첫해라 마음의 여유가 없어서 잘 살피지 못했어요. 그런데 올 초에 파릇파릇하게 새순이 들이밀고 올라오기 시작할 때부터 누가 시킨 것도 아닌데 저 혼자 기록을 시작했어요. '얘네가 오늘은 얼마나 자랐을까?' 관찰하고 체크하면서요.
그런 제 모습을 보면서 다시 한번 느껴요. '아, 나 여전히 이 일을 정말 즐기고 있구나. 또, 식물을 통해서 위로받고, 이 안에서 큰 즐거움을 얻고 있구나' 하고요. '위로와 돌봄'이라는 키워드는 아마 몇 년, 아니 몇십 년이 지나도 저에게는 변함없이 유효한 가치일 것 같아요.
조각 7. 본인의 이름을 되찾도록 돕는
"본인 이름을 되찾아 가시는 모습이, 제가 일을 하면서 가장 의미 있는 부분이에요."
매년 6월 6일이 되면 그녀의 회사는 정원을 기부한다. 소외된 이들에게 정원을 만들어 응원하는 ‘꿈꾸는 정원’, 그리고 정원을 가꾸도록 돕는 ‘가든 볼런티어’까지. 물리적인 정원을 짓는 일 뿐만 아니라, 그녀는 사람들의 마음속 정원까지 돌보는 일을 하고 있다. 본인의 이름을 잃어버린 여성들이 정원을 매개로 자기 이름을 되찾아가도록. 식물을 보살피듯이 사람이 자기 자신을 가꾸는 일을 그녀는 옆에서 돕고 있다.
Q24. (사)푸르네정원문화센터의 '기부정원'은 구체적으로 어떤 활동인가요?
저희 회사가 매년 6월 6일 현충일에 우리 주변의 소외된 분들께 정원을 만들어 응원하는 기부정원 시공 프로젝트 ‘꿈꾸는 정원’을 해오고 있어요. 조성 비용은 클라우드 펀딩도 받고, 식물농장 사장님들이나 주변에서 식물을 후원받고, 정원 자재 업체에서도 기부를 받아요. 그동안 미혼모시설, 장애인 공동생활기관, 호스피스 병원 등에 정원을 만들어드렸는데요. 작년에는 의정부에 '이삭의 집'이라고 1962년부터 전쟁고아를 돌보는 것으로 시작된 1세대 아동복지기관에 기부정원을 만들었어요. 작년 조성 날에는 기관의 아이들까지 모두 나와 고사리 손으로 정원 시공을 거들었답니다. 그리고 저희 내부에 '가든 볼런티어'라고 — 공공의 목적으로 운영되는 곳 중에 정원을 가꿀 수 있는 일손이 부족한 11 곳에 매달 정원봉사를 가시는 분들이 계세요. 이 분들 덕분에 단순히 정원을 기부하는데서 그치지 않고, 한 달에 한 번 기부정원에 가셔서 봉사도 진행하고 있답니다.
Q25. 푸르네에서 하시는 일 중에서 의미 있다고 생각하시는 일이 있으세요?
사실 작년에 이 회사에 취업하면서 사는 지역까지 옮기고, '내가 여기서 무슨 일을 해야 할까' 이런 생각을 많이 했어요. '내가 왜 여기까지 와서 이 고생을 하고 있나' 라는 생각이 들었다가 — 마음을 먹은 게, 저희 회사에 소속 프리랜서 강사님들이 계세요. 정원을 매개로 놀이 강사처럼 정원 관련 프로그램을 진행해 주시는 강사분들이 백 분이 넘으시고, 집중적으로 활동하고 계신 메인 강사님들은 50~60명 정도 되는데, 대부분 경력 단절 여성분들이거나 은퇴 후 제2의 직업을 찾으려는 분들이에요. 그래서 저는 — 그분들이 정원이라는 걸 매개로 사회로 나올 수 있도록 도와주는 역할을 하자, 그것만 생각하자 하고 관점을 바꿨더니 조금 더 일이 보람차고 수월하게 느껴졌어요. 이야기를 들어보면, 이대를 나오시고 50대 중반, 거의 60대가 되신 분이 계신데, 그 시절에는 이대를 나오셔도 결혼하고 애 낳으면 그만두던 시절이었잖아요. 하지만 본인이 아이를 다 키우고 나서, 뭔가를 하고 싶은데 막상 루트도, 방법도 모르다가 저희 회사를 우연히 알게 돼서 지금 강사로 활발하게 활동하고 계신 분들도 있고. 자녀들이 중학교 들어가서 손이 좀 덜 가는 시기에 오셔서 강의를 하시면서 본인 이름을 되찾아 가시는 모습이 — 제가 일을 하면서 가장 의미 있는 부분이에요.
Q26. 정원 박람회 때는 그분들이 출장을 가시는 거잖아요.
네. 1년에 한 번 3박 4일 동안 진행되는 정원 박람회가 그분들은 출장이에요. 본인은 비즈니스적으로 어디를 3박 4일 나간 적이 없는데, '나 돈 벌러 갔다 올게' 하면서 캐리어 끌고 나오실 때 너무 기분이 좋으시대요. 본인 스스로 돈을 벌고 하는 모습이 뿌듯하셔서. 다양한 프로젝트를 하고는 있지만, 저한테 제일 큰 의미가 있는 일은 그 강사분들이 더 많이 사회로 나오셔서 일하시고 돈 버시고 — 엄마로서의 모습이 아니고 본인의 모습으로 활동하시는 거. 그래서 맨날 선생님들한테 '제가 일감을 더 따올게요' 이런 소리를 하고는 있어요.
Q27. 식물을 기르듯이 자기 자신을 다시 기르는 그 과정을, 보현 님이 도와주시는 거네요.
네. 제가 할 수 있는 일이 그 것이다 보니까.
Q28. 바이오의 '🫢 체력 이슈 & 영어 이슈', 여전히 진행 중이세요?
영어 이슈가 없어졌으면 제가 BYS를 그만뒀겠죠(웃음). 사실 지금 일하는 곳에서는 제가 당장 영어 쓸 일이 없거든요. 근데 작년에 이 회사 말고 다른 데 면접 봤을 때 영어 이슈 때문에 떨어진 적이 있어요. 정원사를 뽑는데 거의 원어민급 정원사, 통역사급 정원사를 뽑는다는 얘기를 면접 끝나고서야 듣고는 나의 영어 이슈는 평생 가는 이슈가 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죠. 체력 이슈도 — 정원사라 하면 큰 이슈예요. 사무실 근무도 있긴 한데, 어제도 고양시 꽃 박람회 관련 작업을 하느라 외부에 계속 있다 보니… 그리고 사실 BYS에서 항상 운동의 중요성을 말하다 보니까. 맨날 운동하라고요(웃음). 그래서 BYS 멤버들이 운동을 하다 보니까 저도 자연스럽게 운동을 하려고 하는 것 같아요. 했을 때와 안 했을 때 차이도 있고요. 그래서 계속하고 있어요.
조각 8. 덕구리난, 잘 버티고 있다
'잘 버티고 있다.' 그게 항상 저한테 해주는 말이기도 하거든요."
덕구리난, 겉은 거칠지만 속 안에는 물이 가득한 식물. 물이 부족한 악조건 속에서도 버티고 살아간다. 그리고 그 덕구리난에게 그녀가 건네는 한 마디가 있다. ‘잘 버티고 있다.’ 화분의 크기를 생각하게 했던 그 식물은, 이제 그녀 자신에게 말하는 목소리가 되었다.
Q29. 만약 본인을 식물로 정의한다면 어떤 식물과 닮으신 것 같아요?
덕구리난이 — 물을 안 줘도 잘 살거든요. 몸통 안에 물을 한가득 갖고 있어요. 근데 겉으로 보면 나무 같아요. 다육 식물 같은 느낌은 아니고 나무 같은데, 그냥 그 악조건 속에서도 어떻게든 버티고 살려고, 노력하는 그런 친구. 그리고 되게 오래 살아요.
멕시코에는 350살 먹은 덕구리난도 있다네요. 그 친구를 보면 항상 약간 저 같다는 생각을 많이 했어요. 겉은 거칠고 하지만 속 안에는 물을 가득 채워서 어떻게든 버텨보려는 그런 친구.
Q30. 그 덕구리난한테 한 마디 해주신다면요?
"잘 버티고 있다."
그게 항상 저한테 해주는 말이기도 하거든요. 이 식물은 정원에 일반적으로 심는 식물은 아니에요. 멕시코 같은 데 있던 애다 보니까 외부 기후에 안 맞아서 실내 식물로 많이 키우는데 — 잘 버티고 잘 해냈고, 잘 살고 있구나. 이렇게 말해주고 싶어요.
Q31. 마지막 질문이에요. 5년 후, 보현 님의 '조각보 정원'은 어떤 모습일까요?
여전히 제 땅은 없을 것 같고요(웃음). 하지만 여전히 다른 사람들의 정원을 열심히 다니고, 열심히 만들고, 만드는 걸 도와주고 있지 않을까. 거기에 플러스 — 과거에는 특수학급이나 어린이, 학생 대상으로는 수업을 했지만 조금씩 정원과 관련된 강연을 성인 대상으로까지 확대하고 있지 않을까 싶어요.
BYS에서는 항상 ‘영어로 정원을 소개하는 일을 하고 싶다’는 게 목표라고 말하거든요. 5년 후면 BYS를 7년 정도 한 거니까 그 정도 되면 영어를 잘 할 수 있겠죠? 그때는 — 국내 정원 투어 같은 프로그램을 만들 수 있지 않을까. 미술관 도슨트처럼 정말 정원 도슨트로서, 외국인들에게 한국의 정원을 소개하고, 더 많은 사람들이 정원을 즐길 수 있는 방법을 알릴 수 있는, 그런 일을 해보고 싶어요.
EPILOGUE:
[정원 조각들이 모여 숲 같은 정원을 이루는 그날까지]
조각보 한 폭에는 이음매가 있습니다.
조각이 조각인 채, 자신을 잃지 않으며 동시에 다른 조각들과 한 폭이 되는
그것이 조각보입니다.
그녀가 거쳐온 여덟 조각은 모두 자기 땅이 아닌 정원이었습니다.
회사의 책상, 학교의 식물원, 특수학급의 교실, 30곳의 민간정원, 해외 정원, 두평 남짓 시민 정원, BYS의 자리, 푸르네의 정원까지. 한 번도 자기 땅이었던 적이 없습니다.
그러나 그녀는 빈자리를 부끄러움으로 두지 않았습니다.
오래 사랑 받는 브랜드는 특별해지려고 애쓰지 않습니다. 대신 평범함 안에서 자기만의 척도를 발견하고, 그것을 매일의 근육으로 만들어갑니다.
"나는 오늘도 내 땅 없는 정원사라 서글프기보다, 세상 모든 정원을 내 배움터로 삼을 수 있어 다행이라 생각한다." — 조각보의 글, 내 땅 없는 현실가드너
그리고 그 정의 위에 8년이라는 세월을 쌓았습니다.
"여전히 제 땅은 없을 것 같고요."
5년 후를 묻는 마지막 질문에 그녀가 웃으며 답합니다. 5년이 흘러도 자신의 땅은 생기지 않을 것 같다고. 그러나 여전히 다른 사람들의 정원을 다니고 만들며 도와주고 있을 것이라고. 그리고 외국인들에게 한국의 정원을 안내하는 정원 도슨트가 되어 있을지도 모른다고.
‘Possessing nothing, embracing every garden
소유하지 않기에, 세상의 모든 정원을 품는다
그녀는 소유하지 않음으로써 오히려 세상 모든 정원을 소유한 사람이 되었습니다.
조각보. 흩어진 삶의 조각들이 이음매를 무늬 삼아 한 폭이 되는 이
그녀가 거쳐온 조각 정원들을 이어 붙이면 한 정원사의 인생이 됩니다.
그녀가 앞으로 만나게 될 정원들로 조각보 정원은 더 넓어질 것입니다.
자기 땅 없이 세상의 모든 정원을 품은 정원
이보현은 오늘도 정원들을 누비며 아홉 번째 조각을 잇고 있습니다.
정원 조각들이 모여 모두의 숲 같은 정원을 이룰 때까지.